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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에리] 아침

Aeon16 2016. 8. 29. 19:25

아야세 에리는 아침에 약하다.

학생 때는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매우 힘들어졌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핸드폰 알람이 거슬려진다. 평범한 벨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쾌함이 느껴진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던질 듯한 충동이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핸드폰 가격을 생각하면 잠과 동시에 불쾌감도 달아난다.

 

오늘도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벗어나 세면을 한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나면 약간의 두통이 가라앉고 안개가 서린 것처럼 흐리멍덩한 의식 또한 조금씩 돌아온다.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고 거울 안에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호수와도 같이 푸른 눈동자에는 빛이 돌기 시작하고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 에리는 양손으로 뺨을 세차게 친 후 말했다.

 

좋아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보자.”

 

자신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은 말을 하며 다시금 거울을 보는데, 에리의 양 볼은 빨간 단풍잎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 너무 강하게 때렸어. 뒤늦은 후회를 하며 통증이 밀려오는 볼을 쓰다듬은 뒤 주방으로 나와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한다.

 

오늘은 이런 저런 일정이 겹쳐 살짝 바쁠 예정이니 미리 나가지 않으면 꽤나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옷을 입었다. 선배로부터 받아야 할 자료. 도서관에서 찾아야할 자료. 조별과제의 회의 학생이지만 이렇게 바빠도 되는 걸가 싶지만, 다른 멤버들도 모두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고 이 정도는 다들 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집 밖을 나서려는 순간 다시금 핸드폰이 울렸다.

알람을 맞춰놓지는 않았다.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보니 친숙한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 노조미 나야. 무슨 일이야?”

우리가 무신 일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였나, 내 쪼매 섭섭하데이.”
농담이야, 농담. 얼마 전에도 전화 했잖아.”

그랬제, 근데 내가 오늘 심심해서 에릿치의 점괘를 봤데이.”

왜 멋대로 그런걸 보는 건데.”

마 그런 사소한건 넘어가고, 카드가 말하길 에릿치에게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해줬데이.”

좋은 일? 오늘 많이 바쁜데 노조미를 믿어 볼까.”

그래, ...망설이지 말레이 에릿치.”

“...”

언제까지고 에릿치가 그렇게나 망설이고 피하려 한다면 바로 눈앞에 있는 행복 또한 놓쳐 버리고 말거야.”

“...노조미.”

, 내는 이만 끊겠데이, 곧 있으면 무시무시하고 히스테릭한 토끼가...”


다급히 전화를 끊는 노조미의 핸드폰 너머에서는 누가 히스테릭이라는 거야, 라고 외치는 니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은 정말 잘 지내고 있구나, 저절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내리려 노력하며 다시 핸드폰을 보니 약속까지 살짝 위험한 시간이 되 버렸다. 에리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버스를 타고 길을 걸어 게임의 퀘스트를 종료하듯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일정을 마친다.

 

하아, 지친다.”

 

마지막은 조별과제 회의를 할 카페에 미리 오게 된 에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듯 앉아 한 숨을 쉰다. 땡볕 아래서 하루 종일 걷다보니 너무 지쳤다. 요즘 조금 선선해 졌다 싶었는데 아직 여름이긴 한 것 같았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에리의 테이블 위에 놓인다. 투명한 유리잔 너머로 보이는 얼음사이에 들어 있는 차가 연갈색 액체를 보자 침이 자연스럽게 목 안으로 흘러 내려갔다.

에리는 망설임 없이 유리잔위에 꽂혀 있는 빨대로 커피를 마신다. 차가운 커피가 에리의 목을 타고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몸에 남아 있던 열기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시원함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었다.

 

아아, 좋다.”

 

에리가 커피의 시원함을 만끽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람들 사이로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호노카?”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태양과도 같은 주황빛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본 것 같아 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에리가 나갔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들로 길거리가 가득 차 호노카로 추측되는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역시 착각인 걸까, 오늘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가 싶어 다시 카페로 들어가려 할 때 마침 조원들과 만났다.

 

아야세?”
, ,안녕.”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들어가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조원들과 같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잘못 본 거겠지, 착각이라 단정하고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남은 커피를 마시며 팀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다행이야, 아는 사람들과 같이 하게 돼서.”


지난번 조별 과제 때는 모르는 사람들만 잔뜩 있는데다가 이상한 사람들만 꼬여서 고생 한 것을 다시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그중 한 사람은 선배라고 에리에게 치근덕거렸고 참지 못한 에리가 불 같이 화를 내자,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렸다. 이후 어떻게든 팀을 굴려 과제를 끝냈지만 이후에도 조별과제를 보면 한동안 치를 떨었다. 이렇게 회의가 순조롭게 끝난 것도 좋고 역할 분담 또한 잘된 게 좋긴 한데, 시간이 너무 흘러 버렸네.

 

조별과제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학교에 관해서, 에리는 과제를 어떻게 했냐, 지난번 고백을 받았는데 그건 어떻게 했냐, 등 에리에 대해 탐문 수준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 어떤 교수님의 수업이 좋다. 하는 학생다운 이야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친구들은 같이 저녁을 먹고 가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끌리지가 않았고, 에리는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에리의 머릿속에 신기루처럼 남아있는 주황빛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착각이라고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했기에 에리는 회의를 하면서도 호노카가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호노카를 못 본지 꽤 됐지만, 이렇게 생각이 나다니 나도 참.”

 

아니면 오늘 아침 노조미와 통화를 해서일까, 좋은 일이 생긴 다는 게 호노카를 보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니, 정말 나도 알기 쉽구나. 망설이지 말아달라는 노조미의 말. 그건 분명 맞는 말이지만,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무거워짐과 동시에 발걸음 또한 같이 무거워졌다. 집으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걸음을 멈춰선 에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호노카의 번호를 누른다.

하지만 통화 버튼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에리의 손가락 몇 번이나 누르려 했지만 결국 누르지 못하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왜 이런 걸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은 술이라도 마시는 게 좋겠어. 집에 사다 놓은 맥주가 있었지 아마도.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했다. 마지막 계단을 밝고 올라가자 에리는 다시금 걸음을 멈췄다. 집 문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등을 문에 기대고 졸린 듯 고개가 꾸벅꾸벅 앞으로 흔들리며 무릎을 모으고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 아침에 봤던 태양 빛을 한가득 머금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 소녀 코우사카 호노카가 에리의 집 앞에서 앉아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되잖아.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일단 지금 먼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다가가 졸고 있는 그녀의 몸 위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손이 멈췄다. 조금씩 떨려오는 손 끝, 호노카의 어깨의 바로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으응, 에리쨩?”

, 호노카. ,어서 일어나 여기서 자면 안 돼, 감기 걸릴지도 몰라.”
우음, 나 조금만 더 잘게 5분만 더어...쿠울.”
아니, 그러니깐 여기서 자면 안 된다니깐 호노카.”

 

우여곡절 끝에 호노카를 깨워 집안으로 들어왔다. 에리는 소파에 앉은 호노카에게 핫 초코가 가득담긴 머그잔을 건네줬다. 호노카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핫 초코를 마셨다. 밖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호노카를 집으로 들어오게 할 때 만졌던 호노카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지금도 핫 초코를 마시지 않고 머그잔에 담기 온기로 손을 녹이고 있었다. 에리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담요를 호노카의 어깨위에 덮어줬다. 정말이지 호노카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을 안 해주니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호노카의 맞은편에 앉아. 핫 초코를 홀짝 거리는 호노카를 바라본다.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호노카에 혈색에 에리는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호노카를 바라봤다.

호노카는 에리의 엄격한 표정에 살짝 굳은 듯 보였으나, 에리는 멈추지 않고 호노카를 계속 바라봤다. 호노카는 시선을 돌려 여기가 에리가 사는 집이구나, 같은 말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에리는 호노카의 딴청을 무시하고 그저 호노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호노카도 딴청 피우는 것을 그만두고 손에 들린 머그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둔탁한 소리만이 들려오는 집안 먼저 말을 한 것은 에리였다.

 

호노카.”

.”

어째서 여기에 온거야?”

에리쨩이 보고 싶어서.”
그러면 연락도 없이 집 앞에서 자고 있었어?”

그게...에리쨩을 놀라게 주려고...”
하아...호노카.”
...”

다음부터는 연락을 먼저 해줘, 만약 내가 오늘 친구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했으면 호노카는 여기서 나를 계속 기다렸을테고,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잖아. 만약 호노카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다음에 온 다면 연락은 꼭 해줘 호노카.”
알겠어, 에리쨩 미안해.”


에리의 타박에 호노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만약 호노카에게 귀와 꼬리가 있다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이 아래로 추욱 쳐져 있었을 것이다. 에리도 그런 호노카를 보니 반성을 하는 것 같아 몇 번 헛기침을 하고 호노카를 불렀다. 에리의 부름에 호노카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에리를 바라봤다. 호노카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본 에리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정도면 호노카도 알았을 터이다. 에리는 불안한 듯 떨리는 호노카의 눈을 보며 말했다

 

호노카가 반성하면 됐어. 그리고....늦었지만 어서와. 호노카가 와줘서 정말 기뻐.”

, 에리쨩. 헤헤.”


눈 주변에 조금 흐른 눈물을 닦은 호노카는 다시금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호노카 답다고 생각한 에리는 호노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호노카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살짝 늦어지기는 했지만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원래는 가볍게 컵라면에 맥주를 마실 생각이었지만, 호노카가 왔으니 그런 음식을 내놓을 수는 없다. 에리는 앞치마를 둘러메고 요리를 할 준비를 했다. 그러자 호노카는 소파에서 일어나 에리의 옆에 다가왔다.

 

도와줄게 에리쨩.”
아니, 호노카는 손님이니깐 쉬어도 되는데.”

둘이 하는 게 더 빠르잖아. 그리고 호노카 살짝 배가 고파서 헤헤.”
후훗, 그러네. 그러면 부탁할게 호노카.”
알겠어.”


에리의 말에 따라 호노카는 같이 식사를 준비 했다. 양배추를 썰거나 재료를 씻거나 에리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방에는 맛있는 냄새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고 호노카와 에리의 식욕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요리가 끝나고 식탁위에 올려놓았을 때 호노카와 에리의 배에서는 동시에 소리가 들렸다.

 

꼬르르르륵.

배고픔을 알리는 소리에 호노카와 에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봤다. 잘 먹겠다는 감사의 인사와 동시에 둘은 식사를 시작했다. 호노카와 에리는 배가 상당히 고팠는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식사여서 일까 아니면 호노카와 같이 하는 식사여서 일까 그동안 혼자 먹었던 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려 했지만 일단은 조금 쉬고 싶었기에 빈 그릇들만 싱크대에 넣은 뒤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하나를 꺼내 호노카의 앞에 앉아. 자연스럽게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삼키려는 순간 호노카의 시선이 느껴졌고, 에리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뒤늦게 눈치 챘다. 황급히 맥주캔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흘러나오는 흰 색 맥주거품을 어떻게 숨길 수는 없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탄산이 새어 나오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을 때 호노카가 말했다.

 

에리쨩.”
“..., 호노카?”

맥주 한 캔 더 있어?”

있지...줄까?”

.”

 

호노카의 거침없는 대답에 에리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주방으로가 냉장고를 열고 맥주 하나를 더 꺼내와 호노카에게 건네줬다. 별모양이 새겨져 있는 맥주 캔을 받아 들자 호노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호노카도 술을 좋아 하는 걸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호노카에게 물어봤다.

 

호노카 술 좋아해?”

으음, 평범 할거야.”

그러면 잘 마시는 편인가?”

후후, 에리쨩 보다는 잘 마실지 몰라.”
이런 호노카 내가 누군지 잊은 거야? 내 몸에는 보드카의 고장 러시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후후후후.”

후후후후.”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내며 호노카와 에리는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동시에 맥주 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 뒤 탁자 위에 내려 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액체로 가득 찬 소리가 난 맥주 캔은 탁자 위에 부딪히자 텅텅 빈 캔 소리만이 났다. 간만에 호적수를 찾았다는 강자들의 미소가 서로에게 비춰졌다. 에리와 호노카는 빈 맥주 캔을 치우고 같이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 안에 있는 술을 쓸어 모았다. 맥주부터 시작해서 양주 일본주 등 다양한 종류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호노카와 에리는 동시에 맥주를 집어 들어 한 캔 더 마시려는 순간 호노카가 말했다.

 

에리쨩 우리 그냥 마시면 재미없으니깐 게임하자.”

게임?”

, 호노카가 물어본 질문에 에리쨩이 대답 못하면 에리쨩은 계속 술을 마시는 거야, 만약 호노카에 질문에 대답을 하면 호노카가 술을 마시고 그 다음 부터는 에리가 질문을 하고 이렇게 반복하는 게임이야 어때? , 질문은 어떤 거든 할 수 있어.”
진실게임 같은 건가 좋아. 그러면 시작은 역시...가위.”

바위.”
.”“.”

 

내밀어진 손 에리는 가위를 호노카는 주먹을 냈다. 이로써 질문은 에리부터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까, 에리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 같이 과자가게에 갔을 때처럼 기분이 들떠올랐다. 어떤 질문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할머니가 과자를 마음껏 골라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매력적인 말이다. 어떤 질문을 할지 잠시 고민한 에리는 일단 가볍게 시작하기로 했다.

 

방금 호노카가 마신 맥주의 이름은?”

그거야....? 잠깐 어떤 맥주였어 에리쨩.”

 

각종 술로 뒤섞여 있는 테이블을 보며 호노카는 방금 마신 맥주 캔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테이블은 이미 각종 술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호노카는 주위를 둘러보며 맥주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리는 호노카가 맥주를 찾기도 전에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호노카는 치사하다며 볼을 부풀리고 앞에 놓인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으읏, 다음 질문 해 에리쨩.”
그러면...호노카는 오늘 왜 온 거야?”

에리쨩이 보고 싶어서.”

 

호노카는 한 점 흔들림 없이 바로 대답을 한다. 이건, 위험했다. 오히려 에리가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에리는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손에 들린 맥주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너무 손쉽게 차례를 넘긴 걸까 호노카는 어떤 질문을 할 건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호노카는 질문할 것이 생각이 난 듯 에리를 보며 말했다.

 

에리쨩 호노카는 얼마나 여기에 있어도 돼?”

...호노카가 있어도 되는 만큼.”

그렇구나.”


호노카는 순순히 맥주를 마신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벼운 질문이다. 호노카도 역시 처음은 떠보기로 시작 하는 건가, 에리는 어떤 질문을 할지 고민을 다시금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게임은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어떤 건지부터 시작해서 점점 질문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탁자위의 술이 1/3쯤 비웠을 때 호노카와 에리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발음도 조금씩 새기 시작했고 움직임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에리에게 불행하게도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해 호노카가 대답을 해버렸고 질문 권은 호노카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호노카는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에리에게 말했다.

 

에리쨩 속옷 뭐 입고 있어?”
?”

속옷 뭐 입고 있는거야아아.”

, 하늘색이야.”

보여줘.”

? 무슨 소리야 호노카.”
에리쨩이 거짓말 했을 수도 있잖아. 어서 보여줘.”

 

호노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속옷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호노카를 달래.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호노카의 눈동자는 반쯤 풀려 있었고 보여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보겠다고 말하며 서서히 에리에게 다가오려 했다. 에리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상의를 올려 호노카에게 속옷을 보여줬다. 그러자 호노카는 에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옷을 빤히 바라봤다.

 

호노카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 호노카의 따스한 숨이 피부에 닿아 에리를 간질였다. 호노카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해 달라고 하지만 호노카는 들은 척 만 척 하며 에리의 속옷을 빤히 바라본다. 점점 더 가까워져 오는 호노카의 얼굴에 에리는 다급히 옷을 내려 호노카의 호노카의 접근을 막아 버렸다.

 

우우, 닳는 것도 아닌데 에리쨩 치사하다...”

아냐, 닳아 여러 가지가 닳아 버려.”

그러면 이번에는 호노카가 마실 차례지.”

 

호노카는 맥주 캔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이미 잔뜩 취한 것처럼 보이는 호노카에게 더 이상 술을 마시게 할 수는 없었다. 에리는 호노카의 앞에 놓여 있는 맥주 캔을 가로 챘고, 호노카는 에리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호노카의 손은 허공을 휘적일 뿐이었다. 그러자 호노카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에리쨩 어서 줘어, 호노카가 마실 차례잖아.”

안 돼, 호노카 너무 많이 마셨어. 이제 그만하자.”
우우, 싫어 계속 할 거야. 아직 에리쨩한테 못 물어 본 게 있어. 그걸 물어 볼 때까지 할 거야.”

그러면 내 질문 권을 호노카에게 줄게 질문해봐. 이게 마지막이야 호노카.”

“....”

 

호노카는 결심한 듯 에리를 바라본다 술에 취해 반쯤 풀려 있던 호노카의 눈동자에 조금씩 힘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크게 쉼 호흡을 몇 번이나 한 호노카는 큰 결심을 한 듯 에리를 바라봤다. 한 점 떨림 없는 푸른 하늘과도 같은 맑은 눈동자를 보자 에리는 왠지 모르게 불안함을 느꼈다.

 

에리쨩은 날 좋아해?”

 

호노카의 단 한 마디 날 좋아해? 그 질문에 에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에리는 손에 들린 맥주를 마신다. 그러자 호노카는 에리에게 다시 질문을 한다.

 

에리쨩은 날 좋아해?”

 

에리는 옆에 있는 맥주 캔을 들어 다시금 술을 마신다. 다시 질문할 권리는 호노카에게로 간다. 호노카는 에리를 보며 말한다.

 

에리쨩 왜 그렇게 떨고 있어?”

“...”

호노카가 하는 질문이 에리쨩을 힘들게 한다면 이제 그만할게 에리쨩이 힘들어 하는 건 호노카도 싫어. 이게 마지막 질문이야 에리쨩.”
“...”

에리는 날 좋아해?”


그래, 그냥 좋아해 라고 말하면 되는 질문. 하지만 에리는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호노카에게 품은 감정을 피해왔다. 고백하는 것을 망설여왔다. 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것 같은 자신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호노카가 본다면 어떻게 자신을 볼지 그것이 무서웠기에 호노카에게 품은 감정이 커질수록 에리의 망설임은 더욱더 커졌다. 지금 호노카가 하는 질문 또한 모른 척 하고 피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태연하게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감정을 죽이고 손에 들린 맥주를 마시면 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에리는 손에 들린 맥주 캔을 입으로 천천히 옮겼다. 호노카의 눈동자에 슬픔의 빛이 서리려는 순간 에리는 맥주 캔을 강하게 탁자 위에 내리쳤다. 안 에 든 내용물이 탁자위에 쏟아지고 갑작스러운 에리의 행동에 놀란 호노카는 에리를 바라본다.

 

. 좋아해.”

“...”

난 호노카를 엄청 좋아해. 항상 같이 있고 싶고 항상 호노카의 옆자리에 있고 싶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정말 싫어. 더 이상 친구로써 지내는 건 너무나도 힘들어 이제는 호노카에 대한 내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지쳐. 호노카가 내 집 앞 에서 자고 있을 때 호노카의 어깨를 만지는 것 조차 힘들었어. 만약 그 상태로 호노카를 만졌다면 나는 호노카에게 아마 키스했을거야. 아니 분명히 했어. 그리고 지금 술에 잔뜩 취한 호노카를 보면 지금 당장에라도... 알겠지. 난 호노카를 정말 좋아해. 그런 호노카가 나를 싫어 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게 나는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그동안 호노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

 

폭우와도 같이 쉴세 없이 쏟아지는 에리의 말에 호노카는 에리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낸 에리는 거친 숨을 내몰아 쉬었다. 방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에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다. 호노카에게 무엇이든지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호노카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에리는 호노카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질문을 한다.

 

이런 나를 좋아해 줄 수 있어 호노카?”

 

취기에 휩쓸린 말 같은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호노카의 대답에도 피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다. 이제 망설이고 피하는 것에는 지쳐 버린 지 오래다. 에리의 고백을 들은 호노카는 에리를 바라본다. 여전히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을 보며 이런 호노카의 얼굴 또한 귀엽다고 생각해버린다. 그 순간 호노카가 입을 열었다.

 

바보.”

?”

에리쨩은 완전 바보야. 멍텅구리, 해삼, 말미잘. ......쿼터 러시아인.”

마지막은 맞는 말인데.”

왜 이제야 말해 주는 거야. 나도 에리쨩을 정말로 좋아하는데.”

“...정말?”

그래, 에리쨩이 언제 부터인지 호노카를 피하 길래 에리쨩이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언제나 연락해도 딴청만 피우고 그래서 오늘은 연락 안하고 온 거야. 역시 노조미쨩 말이 맞았어. 에리는 완전 겁쟁이야.”

우읏...”

게다가 호노카한테 키스 하는 게 뭐 어때서. 호노카도 에리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이 겁쟁이.”

그런 짓을 갑자기 하면 호노카가 싫어할 것 같아...”

호노카가 에리쨩을 싫어 할리 없잖아. 정말로 엄청 좋아해.”

정말?”

당연하지.”


탁자 위에 엎드린 호노카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에리의 앞으로 다가 가려 했다. 그러나 두 다리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듯 호노카는 거의 넘어지듯 에리에게 다가갔고 에리는 그런 호노카를 받아줬다.

 

호노카는 말이야, 에리의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 언제든지 호노카가 태양처럼 에리를 감싸 안아 줄게.”

호노카...”

 

에리의 품안에 안겨 있는 호노카 둘의 거리는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 진한 술 냄새와 체취가 뒤섞여 서로를 끌어당긴다. 둘의 입술은 자연스레 겹쳐지고 호흡이 하나가 된다. 초콜렛과도 같이 달콤하고 황홀한 순간이 끝나고 에리는 호노카를 끌어안으며 호노카에게 속삭였다.

 

정말 좋아해 호노카.”

“...”

호노카?”

“...”

설마?”

쿠울...”

 

술이 아닌 잠에 취해 버린 호노카를 침실로 옮긴 뒤 난장판이 된 집을 보며 에리는 한 숨을 쉬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은 그냥 호노카의 옆에 누워버렸다. 언제나 넓게 느껴지는 침대였지만 역시 단 둘이 사용하니 비좁다. 그렇지만 이대로 잠을 자는 것도 좋다 생각하며 그대로 몸을 눕혔다. 호노카의 온기를 느끼며 에리도 같이 잠에 취해갔다.

 

아침이 찾아오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알람음이 방안에 울려 퍼진다.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손을 뻗어 핸드폰의 알람을 끄고 몇 시인지 확인을 한다. 오늘은 다행히 쉬는 날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자도 되겠지. 다시금 이불을 가져와 머리끝까지 올렸으나, 이내 다시 이불이 내려갔다.

 

에리쨩 아침이야 어서 일어나.”
우응...?”
어서 일어나 커피 가져왔어.”

,호노카?!?”

 

에리의 앞에서 머그잔 두 개를 들고 해맑게 웃는 호노카를 본 에리는 깜짝 놀라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어째서 호노카가..., 맞아. 어제 놀러왔지. 에리의 머리는 뒤늦게 모든 일을 생각해냈다. 어제 호노카에게 고백을 해버렸다. 분명 둘 다 취할정도로 술을 마셨기에 호노카가 기억하는지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호노카가 내민 머그잔을 받아 들어 커피를 마셨다. 향긋한 커피의 향이 에리의 코 끝 에서 맴돈다. 항상 일어나면 두통이 먼저 찾아왔는데 오늘은 전혀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호노카와 같이 거실로 나간다.

 

어라, 거실이 깨끗해?”

헤헤, 호노카가 먼저 일어나서 정리해놨어.”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맥주 캔과 쓰레기들은 전부 정리 되어 한 곳에 모여 있었고, 주방의 설거지 또한 전부 정돈되어 있었다. 호노카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 같은 소파에 앉아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기 호노카?”

, 에리쨩.”
어제 일 기억나?”

 

떨려오는 목소리 에리는 초조하게 호노카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고백을 했는데 호노카가 기억을 못한다면 전부 허사로 돌아가 버린다. 에리는 방금 커피를 마셨지만 입안이 바싹마르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호노카는 머그잔을 내려놓고 에리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해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리의 눈동자는 동그래져 호노카를 바라봤고 호노카도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에리쨩이랑 키스 했었어.”

전부 기억 하는 거네.”
물론이지. 이제 에리쨩은 도망 못쳐. 헤헤.”

 

정말로 에리가 도망을 못가에 호노카는 에리에게 팔짱을 꼈다. 옷 너머로 전해져 오는 호노카의 온기, 몸을 타고 올라오는 부드러운 체향에 에리는 미소를 지었다. 호노카가 곁에 있다면 아침은 얼마든지 맞이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호노카를 바라보며 말한다.

 

호노카...내가 자리를 잡고 호노카가 졸업을 하면...우리 같이 살래?”

, 좋아!!”
너무 즉답 아니야? 물론 나는 좋지만.”
에리쨩이 있다면 어디든지 좋아. 헤헤.”
“...나도 호노카가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아야세 에리는 여전히 아침에 약하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힘들고 항상 울리는 핸드폰 알람소리가 싫다. 하지만 이런 아침을 싫어 할 수는 없다. 눈이 뜨이기도 전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졸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지만 에리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온다.

 

에리쨔앙, 일어 나 출근해야지.”
으으...”

어서어, 호노카도 곧 나가야 한단 말이야.”
“...”

 

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호노카에게로 몸을 돌린다. 호노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에리에게 다가간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을 깨우듯 눈을 감은 호노카만의 공주님에게 입맞춤을 해준다.

 

좋은 아침 호노카.”
좋은 아침이야 에리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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