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이 지며 땅거미가 길게 드리워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기지개를 켜보니 주위의 동료들은 하나 둘 퇴근 준비를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여 진 시계를 보니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시간인데도 아직 해가지지 않다니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시침이 숫자 6에 멈추자 퇴근하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몰려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껴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닫는다. 복도를 걷고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옆 부서의 동기가 서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한 잔 하러 가지 않을래? 다른 친구들도 같이 가기로 했어.”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며 눈을 빛내는 동기를 보니 고민이 된다. 확실히 회사 동기들과 같이 마신 기억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공허한 외침만이 벽에 반사되어 울리고 그 자취를 감춘다. 이미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욱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이대로 바닥과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편할까 역시 바닥으로 태어났어야 했나 쓸데없는 잡념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귀찮은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자의식을 건드릴 때 쯤,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꼬르르륵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어째서 배가 고파오는 걸까, 바닥과 하나가 되기 일보직전인 몸을 일으켜 바로 앞 주방으로 향했다. 손을 뻗어 찬장을 열어 먹을 것을 찾아보니 라면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즉석 식품 조차 없는 찬장이라니 서글퍼..
아무도 없는 식당의 중앙에는 조명 아래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치워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종소리와 같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들어온 이들은 매우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각자의 자리에 앉는 4명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하얀 정장을 입은 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연다.“다들 오랜만이야, W, F,그리고 D.”“그렇군, 다들 여전한 얼굴이야.”붉은 정장을 입은 W라 불린 이가 맞장구를 친다. 그의 근처에는 진한 화약 냄새와 기름 냄새가 맴돌았지만, 자리에 앉은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그럼 음식을 주문해 볼까?”검은 정장을 입은 F는 메뉴판을 본 뒤 가장 먼저 음식을 주문한다.“여기 B세트에 파이 추가 하겠습니다.”“여전히 많이 먹는군.”“늘 배가 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