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돌아갈까? 요우쨩?” “미안 치카, 오늘은 수영부 연습이 있어서.” “그렇구나, 그럼 먼저 돌아갈게.” 어딘가 아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교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귤내음이 나는 듯한 잔향이 사라지고 나서야 뒷문에서 시선을 때고 몸 깊숙이 숨겨놓았던 한 숨을 내뱉는다. “어째서 거짓말을 한 걸까…….” 치카가 다른 수영부 친구에게 물어보면 금방 들킬 뻔한 거짓말을 해버렸다. 수영부 연습을 하는 날이 아니지만 치카의 물음에 급하게 대답해 버린 게 이런 거짓말이라니 자신의 한심함과 치카의 아쉬워하는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을 때는 역시 이곳 밖에 없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 흔들림 한 점 없는 투명한 물이 눈에 들어온다. 수영장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눈동자는 붉은 색이다. 마치 인간의 몸에 흐르는 피와도 같은 색을 띄고 있으며, 인간들을 꾀어 영혼을 취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사로잡힌 영혼은 어느 곳도 가지 못하고 평생을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게 된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눈동자를 잘 보아라 붉은 색 그것이 악마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철썩 같이 믿으며 자라온다. 그렇기에 나는 버려졌다. 악마의 상징이라 불리는 이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이 수도원에 버려졌다. 내가 버려진 날은 날씨가 흐린 밤이었다고 신부님이 말씀해주셨다. 그날 마을에서 늦게 돌아오신 신부님이 아니셨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 지도 모른다. 부모에게 버려져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 신부님의 권유에 따라 신..
저녁노을이 지며 땅거미가 길게 드리워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기지개를 켜보니 주위의 동료들은 하나 둘 퇴근 준비를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여 진 시계를 보니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시간인데도 아직 해가지지 않다니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시침이 숫자 6에 멈추자 퇴근하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몰려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껴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닫는다. 복도를 걷고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옆 부서의 동기가 서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한 잔 하러 가지 않을래? 다른 친구들도 같이 가기로 했어.”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며 눈을 빛내는 동기를 보니 고민이 된다. 확실히 회사 동기들과 같이 마신 기억이..
“더워.”“그러게, 아직 6월 초인데 이렇게 덥다니.”들고 있는 과제 뭉치로 부채를 만들어 흔들어 봤지만 전혀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가져온 얼음을 가득 담은 주스도 바닥을 보인지 오래고 이제는 얼음이 녹아 달그락 소리를 내며 물이 되어 잔을 채우고 있었다.“에리쨩 이제 무리야 호노카 녹아서 쓰러질 것 같아.” “나도 힘드니 어쩔 수 없네.” 에리는 책상위에 준비해 놓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짧은 감탄사를 낸 호노카는 희망이 가득한 눈으로 리모컨 끝에 있는 여름의 구원자이자 희망인 에어컨이 자리 잡고 있는 벽을 본다.‘삐빅’ 경쾌한 기계음이 들리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기동 음이 방안에 울려 퍼지고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 이제 곧 시원한 바람이 나올 것이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다녀왔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자, 거실에는 먼저 집에 온 유키호와 아리사가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익숙치 않은 언어들이 스피커 너머로 흘러 나왔고, 호노카는 그에 이끌리듯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 언니왔어?”“안녕하세요.” “다녀왔어 유키호. 근데 지금 뭐 보고 있는거야?” “아리사가 가져온 러시아 영화 지난번에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리사가 가져와줘서 보고 있는 중이야.” “헤에, 그렇구나.” 러시아 영화라 에리도 종종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본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배경과 배우들이 나와 이국의 말로 이야기를 나눈다. 다행이 화면 아래에 자막이 나와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이나마 알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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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켠다. 밤새 굳어 있던 몸, 근육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며 작게 신음소리를 낸다. 안개가 낀 듯 흐리멍덩한 정신을 잡는데 아주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 침대에서 나온다. 벽장위에 걸려 있는 시계는 언제 나와 같은 시간을 가리킨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먹은 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요즘 따듯한 온수로 몸을 덥히는 것은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고 준비한 속옷을 입으려는데 최근 들어 조금 끼는 느낌이 든다. 다시 속옷을 사야 하는 걸까, 눈물 나는 지출에 절로 한 숨이 나올 것 같았다. 벽에 걸어 놓은 교복을 입고 등교 준비를 한다. 목도리를 감고 장갑을 끼기 전 하루를 시작하는 일중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장갑을 내려놓..
생일. 자신이 태어난 날을 말한다. 1월부터 12월에서 1일부터 30일까지 다양한 날이 존재하며 각자의 생일이 존재하며 그날 하루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기분 또한 맛 볼 수 있다. 10월 21일 집안에 걸려 있는 달력에는 붉은색 동그라미가 매우 큼지막하게 그려져 20일과 22일을 가리고 있었다. 에리는 한사코 말렸지만 같이 사는 동거인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버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방안을 가득 메우던 물소리가 접시를 닦는 소리로 바뀐다. 주변의 물기까지 완벽하게 제거한 후에야 에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슬슬 준비해 볼까.” 주황색 앞치마를 벗어 걸어 놓은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되어 갔다. 여유가 있을 거 라고 생..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는 한 여름. 여름하면 역시 수영장. 수영장에서 다 같이 즐겁게 노는 건 여름의 필수코스이다. 이번 여름 주말에도 모두와 같이 수영장에 가기로 했을 터이다. “호노카, 일단 수영장에 오긴 왔는데...노는 게 아니라 청소를 하는 거구나.” 교내에 있는 물이 빠진 수영장 안에 서있는 호노카는 주변을 둘러봤다. 벽 주변에 붙어 있는 물 때, 햇빛에 달궈진 바닥, 조금 남아 있는 물기. 수영장에 있는 것은 호노카 뿐이었다. 학생회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당당하게 수영장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 너무나도 섣부른 선택이었다. “코토리쨩. 우미쨩...” 코토리쨩과 우미쨩은 둘 다 일이 있어서 오후에나 온다고 했고, 학생회의 일이니 다른 멤버들은 부르지 않았다. 청소용 솔을 들고 서있는 호노카는 고개를 ..
시작은 아주 평범했다. “니콧치.” “왜 불러?” 평소와 다름없이 부르는 노조미의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해 줬다. 이번에도 별거 아니겠지, 아니면 단순히 장난치려는 거나,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며, 아이돌잡지를 보고 있을 때 노조미가 말했다. 평소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장난을 치듯이. “내 니콧치를 좋아하나보다.” “그래. 니코도 니코가 좋아.” “그러니 사귀자.”“그래...응?”“참말이지!! 그라믄 오늘부터 시작하는기다.” 이렇게 얼떨결에 사귀게 돼 버렸다. 당황해서 노조미에게 이런 식으로 사귀는 건 좀 그렇다고 말했지만,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니콧치는 내가 싫은기가? 그런기가? 내는 니콧치를 참말로 좋아하는데,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물론 노조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