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공허한 외침만이 벽에 반사되어 울리고 그 자취를 감춘다. 이미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욱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이대로 바닥과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편할까 역시 바닥으로 태어났어야 했나 쓸데없는 잡념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귀찮은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자의식을 건드릴 때 쯤,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꼬르르륵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어째서 배가 고파오는 걸까, 바닥과 하나가 되기 일보직전인 몸을 일으켜 바로 앞 주방으로 향했다. 손을 뻗어 찬장을 열어 먹을 것을 찾아보니 라면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즉석 식품 조차 없는 찬장이라니 서글퍼..
아무도 없는 식당의 중앙에는 조명 아래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치워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종소리와 같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들어온 이들은 매우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각자의 자리에 앉는 4명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하얀 정장을 입은 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연다.“다들 오랜만이야, W, F,그리고 D.”“그렇군, 다들 여전한 얼굴이야.”붉은 정장을 입은 W라 불린 이가 맞장구를 친다. 그의 근처에는 진한 화약 냄새와 기름 냄새가 맴돌았지만, 자리에 앉은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그럼 음식을 주문해 볼까?”검은 정장을 입은 F는 메뉴판을 본 뒤 가장 먼저 음식을 주문한다.“여기 B세트에 파이 추가 하겠습니다.”“여전히 많이 먹는군.”“늘 배가 고프..
분명 아침 일기예보에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었기에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저 기우라 생각하며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흐려진 하늘에서는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큰일이군요.” 전혀 수그라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 장대비를 보며 우미는 궁도부실 앞에 서있었다. 이렇게 비가 온다면 뛰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핸드폰을 보며 누구에게 연락을 할 까 고민하던 도중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미?”“에리? 어째서 이 시간까지?”“우미야 말로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궁도부실 앞에 서있는 에리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오늘은 특별히 우미가 궁도부원들에게 궁도 시범겸 교육시간이 있어서 궁도부원들의 지도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늦었고 홀로 남아 오랜만에 활을..
건물의 불이 하나 둘씩 꺼져가는 밤. 시간이 깊어 떠들썩했던 거리는 적막만이 내려 앉아. 풀벌레 우는 소리와 가로등 불 빛 만이거리를 밝히고 있는 깊은 밤. 이런 야심한 시간에도 유난히 밝은 빛을 내는 방이 있었다. 거실의 형광등은 밝게 켜져 있었고, 거실에는 한층 밝은 노트북 빛이 더해졌다. 능수능란하게 키보드 위를 무대 삼아 춤추는 손가락들은 쉴 틈 없이 춤을 추고 경쾌한 타자소리들이 무대의 배경음악이 되어줬다. 무대가 끝을 고하듯 타자 위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옆에 있는 마우스로 옮겨가 몇 번이나 노트북 화면 위를 움직였다. 잠시 뒤 노트북을 닫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하고 기지개를 킨 코토리가 말했다. “으음, 끝났다. 우미쨩은?”“저도 이제 막 끝났습니다.” 우미도 노트북을 닫고 ..
험담[險談]:남의 흠을 찾아내어 하는 말. “어째서 요하네님이 즈라마루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야.” 요시코는 불만스러운 듯 이야기 했지만, 친구에게 부탁을 받은 것이 나름 기뻤다. 누군가 자신에게 의지를 해준다니 실로 리얼충스럽지 않은가. 방과 후 도서정리를 도와 달라는 간단한 부탁. 오늘은 스쿨아이돌 연습도 없기에 곧장 도서실로 향했다. “즈라마루 이 몸이 도와주러 왔어. 어라? 없잖아.” 텅 빈 도서관은 요시코가 기다렸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요시코의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아직 안온건가. 즈라마루 먼저 말했으면서 도서관에는 없다니, 살짝 볼을 부풀리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 요시코는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책을 보며 살짝 후회했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정리해야 하는 책들을 뒤로하고 도..
그것은 둘만의 약속이었다. 에리가 졸업을 하던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던 호노카에게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며 건네준 것이 있다. 딱딱한 금속의 감촉에 손을 펴보았다. 그것은 열쇠였다. 의문을 가득품은 눈동자로 에리를 바라보았다. “에리쨩 이게 뭐야.”“그게...4월부터는 혼자 살게 됐어. 거기의 집 열쇠야.” “엣?” 에리는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했다. 에리의 집 열쇠를 바라보자,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손에 들려 있는 열쇠를 강하게 쥐며 에리에게 말했다. “에리쨩.”“왜 호노카?” “나 에리쨩이 있는 학교에 갈게.” “응?” 당황한 듯한 에리쨩의 얼굴은 아직도 잊을 수 가 없었다. 그때 살짝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건 비밀로 묻어두고, 여자저차해서 에..
따스한 햇 빛이 창문 너머로 들어온다. 어느새 완연해진 봄의 기운이 물씬 풍겨온다. 형형색색의 꽃들은 자신의 뽐내듯 아름답게 피어 있고, 새들은 다시금 나무 아래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갓 내린 커피 한잔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같이 올라온 향은 방안에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에리는 커피를 따른 머그컵을 들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카페의 마스터에게 부탁해서 원두를 얻어 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다시금 커피를 음미하려고 했을 때, 알람이 울려 퍼졌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시계 알람을 끄고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분명 봄은 좋은 날씨다. 따스해지고 주변이 저절로 아름다워 지는 계절, 그러나...에리에게는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환절기도 같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얀 가운을 두르고 ..
사랑은 언제나 뜨겁지 않다. 때때로 어느 것 보다도 차가워 질 수도 있는 감정이다. 언제 부터였을 까, 우리 둘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마키가 말했다. “같이 살지 않을래?” 의대로 진학을 하게 된 마키는 학교 근처에 원룸을 구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어 말한 듯 떨고 있는 마키를 보고는 미소를 짓고, 그러자고 하였다. 처음에는 서로의 생활패턴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다투기도 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바탕 거사를 치루고 난 뒤, 서로에게 사과를 하고는 여러 가지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니코&마키 결의서이다. 몇 번이나 수정 된 흔적이 보이는 너덜너덜 한 종이를 보며, 니코는 한 숨을 쉬었다. 시간이 흘러, 마키는 당연한..
평소에 맞춰 놓은 시간대로 알람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듣지 못한 것으로 하고 싶었지만, 매정하게도 알람 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재촉에 마키는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평소보다도 강하게 시계를 내려쳤다. “가기 싫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찾아왔다. 어제 침대에 누우면서도 오지 않을 꺼라 생각을 했지만, 막상 아침이 다가오니, 뭔가 허무했다. 좀 더 절망적인 느낌일줄 알았는데, 왠지 아직까지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이 덜 깨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아침밥이 다되었다는 마마의 목소리에 내려갈게, 라고 짧게 답한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마키쨩, 어서 자리에 앉으렴.” “파파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