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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비.

맑은 날에 잠깐 내리는 비이다. 옛 이야기에서는 여우를 사랑한 구름이 여우가 시집가자 너무 슬퍼 우는 비를 여우비라고 했다고 한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온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기에 당연히 우산 또한 준비 하지 않았다. 여우비가 내리는 한 낮에 호노카는 비를 피하기 위해 거리를 달리고 있었지만, 도무지 비를 피할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 바구니를 품에 안고 걸음을 재촉하던 도중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해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얼른 그쳤으면 좋겠는데.”

 

발을 동동 굴러 보지만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쯤 그칠까,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노려봤지만,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장 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에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을 위해 사놓은 와인을 보며 호노카는 한 숨을 쉬었다.

이대로라면 늦을 것 같아. 호노카는 그냥 집까지 달려가기로 결정했다. 마음속으로 하나 둘 숫자를 세며 달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동물의 귀 정확히는 여우의 귀가 달린 여성이 있었고 등 뒤에는 탐스러운 금색 꼬리가 살랑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황혼과도 빛을 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호노카?”

, 에리쨩?”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리의 머리위에 달려 있던 여우 귀와 등 뒤에서 움직이던 꼬리 또한 사라져 있었다. 헛것을 본건가 호노카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에리에게는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호노카를 빤히 바라보자, 에리는 손을 뻗어 비에 젖은 호노카의 머리카락 끝을 만졌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물기, 여기저기 젖어 있는 옷과 살짝 파랗게 질린 호노카의 뺨과 손. 에리는 머리카락에서 손을 놓고 곧장 호노카의 손을 잡아줬다.

 

비를 얼마나 맞은 거야.”

그게, 갑자기 내려서, 근데 에리쨩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났거든. 그래서 집에 일찍 들어가서 놀래 켜 주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

이 우산은? 에리쨩 혹시 우산 가지고 나갔어?”

가지고 나간 건 아니고 지난번에 호노카가 챙겨준 우산이 가방 안에 있어서. 정말 호노카는 내 수호천사구나라고 생각했지.”

우우, 내가 그러면 에리쨩 항상 미리 빼놓으라고 한 소리 하면서.”
덕분에 이렇게 호노카랑 같이 한 우산 아래에 같이 갈 수 있게 됐잖아.”

우우, 치사해.”

 

살짝 토라진 호노카를 우산 안으로 당겨주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산이라는 작은 공간 아래에서 서로를 젖게 하지 않기 위해 밀착에 가까울 정도로 붙어있는 호노카와 에리 사이에는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붙어있는 몸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달콤한 체취가 몸을 타고 올라와 후각을 간지럽힌다. 조금씩 달아오르는 몸. 이 분위기를 상쇄하기 위해 에리가 먼저 말했다.

 

저기 호노카 아까 왜 그렇게 멍하니 있던 거야?”
, 아까?”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호노카는 잠시 고민했다. 에리쨩에게서 여우 귀랑 꼬리가 보였어. 이렇게 말하면 분명 에리는 웃어 넘겨주겠지만, 에리쨩이라면 호노카는 요즘 그런 쪽을 좋아 하냐면서 준비를 할 게 분명하니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냥 에리쨩이 너무 예뻐서.”

,, 그래?”
에리는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다시 대화가 중단되고 무안한 공기가 흐를 차에 다시 에리가 말했다.

그 바구니 안에 뭐가 들은 거야 엄청 무거워 보인데, 내가 좀 들어줄까.”


아니야, 에리쨩은 우산 들고 있잖아. 괜찮아. 안에는 오늘 장본 거. 사실 에리쨩보다 일찍 집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준비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에리쨩을 만나 버렸네, 헤헤.”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호노카를 달래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됐다. 처음에는 기숙사를 들어갈까 고민하던 호노카는 에리가 반쯤은 농담 삼아서 호노카에게 같이 살게 제안을 했다. 그러자 호노카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며, 에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 에리와 같이 살 테니 허락을 해달라고 했다.

호노카의 집에 온 에리는 어리둥절해서 몇 번이나 호노카를 불렀지만, 호노카는 잠시만 기달려 보라며 부모님을 불렀다. 왠지 모르게 그때 집안 분위기는 무거 웠고, 에리는 정좌한 상태에서 몇 번이나 부모님에게 질문을 받았고, 호노카의 어머니는 호노카에게도 질문 했다.

 

저기, 호노카 여기 아야세 양이랑 같이 살고 싶니?”

, 난 에리쨩을 정말 좋아하는걸.”

, 호노카.”

그렇구나. 그럼 아야세양 우리 호노카를 잘 부탁해요.”

 

에리의 양손을 잡아주며 부탁을 하는 엄마의 모습은 약간 서글퍼 보였다. 그 뒤 에리와 같이 이사 날짜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에리에게 호노카의 아버지는 고급 만쥬를 에리에게 건네 줬다. 호노카가 알기로는 그 만쥬세트는 상당히 축하할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비매품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에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손을 떨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호노카를 품에 꼭 안아줬다. 그렇게 시작한 동거생활은 항상 행복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끔가다가 작은 말다툼이 크게 번져 몇 번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둘 다 울며 사과하는 걸로 끝났고 싸운 뒤에는 그 이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자 도착했다.”

에리쨩 문 좀 열어줘.”

 

에리는 주머니에서 작은 곰돌이 마스코트가 걸려 있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언제나 들어오는 집이지만 이순간이 제일 반갑다. 역시 집보다 편한 곳이 없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호노카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오늘을 위해 사놓은 재료들을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와인, , 고기, 등등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생각 할수록 아쉬웠다. 그런 호노카의 뒤에서 에리의 얼굴이 살며시 옆에서 등장했다.

 

깜짝 파티 못해줘서 아쉬운 거야 호노카?”

헤헤, . 자꾸만 생각나네...”

흐음, 그러면 우리 소풍 갈까?”

소풍?”

 

뜻밖의 에리의 제안에 호노카는 놀랐다. 소풍이라 데이트로 몇 번 같이 나가 본 적 있었지만 소풍이라는 본격적인 준비를 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둘 다 학생이다 보니 주말에도 과제가 있어서 울며 식탁 위에 노트북을 하나씩 올려놓고, 과제를 얼마나 했는지를 물으며 밤을 샌 적도 빈번하게 있었다.

그런 둘에게 소풍이라니,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묘한 흥분과 두근거림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호노카는 에리에게 말했다.

 

그러면 언제 갈까 에리쨩.”
글세,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는데, 이틀 뒤 토요일에 가자.”
정말이지?”
그럼. 물론이지.”
근데 에리쨩. 손이 자꾸만 올라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나.”


호노카를 뒤에서 끌어안았던 에리의 손이 점점 호노카의 몸을 타고 올라 고 있었다. 에리는 아무것도 모른 다는 듯 말하며 재료를 정리하는 호노카의 몸을 만지고 옷 안에 손을 넣었다.

 

,잠깐만 에리쨩.”


물건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에리의 양손을 잡으며 호노카가 몸을 돌려 에리를 정면에서 바라봤다. 역시 장난이 너무 심했나. 호노카가 어떤 말을 할까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호노카가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목욕 먼저 밥 먼저 아니면 호노카 먼저?”

 

호노카의 말에 에리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호노카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촉촉하며 부드럽다. 손 끝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보며 호노카에게 말했다.

 

나는 당연히 호노카 먼저지만, 내가 그런 질문을 하면 호노카는 어떻게 할 거야?”
으음, 호노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은 어린아이가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와 사뭇 비슷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머리를 잔뜩 쓰담 드어 주고 귀여워해주고 싶었지만, 호노카의 대답이 궁금했기에 풀어지려는 얼굴에 힘을 주고 호노카를 지켜봤다.

 

호노카는...에리쨩이랑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목욕을 하고 에리쨩이랑 같이 있을래. 왜냐면 에리쨩이랑 다 같이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니깐.”
으읏.”

에리쨩?”

 

항상 이렇게 호노카는 가슴을 뛰게 하는 대답을 한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상상이상의 위력을 발휘해 에리의 심장을 뒤흔들어 놓는다. 붉어진 에리의 얼굴을 보며 호노카가 말했다.

 

에리쨩 얼굴이 빨개졌어, 어디 아픈 거야?”

,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소풍은 이번 주말로 결정. 어떤 약속도 잡으면 안 돼.”

, 알겠어. 어떤 걸 준비 할까나.”

그리고, 오늘은 호노카가 말 한 대로 해줄게 같이 목욕하고...”

 

에리가 말을 오늘의 계획을 말 하고 있을 때, 호노카는 속으로 걱정했다. 오늘은 가볍게 넘어가고 소풍에 전력을 다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에리는 오늘부터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호노카가 곤란해 하며 에리에게 말을 하려는 순간, 에리의 검지가 호노카의 입술에 닿고 호노카의 귓가에 다가와 나지막히 속삭였다.

 

오늘 깜짝 파티를 준비한건 호노카 만이 아니야.”

 

에리는 티셔츠를 살짝 내려 속살을 보여줬다. 옷 안에 입고 있는 것은 예전에 호노카와 에리가 티비를 보던 중 홈쇼핑 채널에서 나온 속옷이었다. 그때 에리와 같이 정말 야하다.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에리가 그 속옷을 입고 있었다. 에리의 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검은색을 하고 있어 더욱더 부각되어 보였고, 옆에 수놓아진 레이스 사이사이로 보이는 피부 또한 호노카를 긴장시키기 충분했다.

호노카가 침을 삼키자, 에리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티셔츠를 올리며 말했다.

 

이런 걸 준비했는데 오늘 호노카가 피곤해 보이네.”

우우읏.”

역시 환불해야 할까.”

오늘은...”
참 이거 상하의 세트인거 알지 호노카?”
그러면 일단 밥부터 먹자 에리쨩, 목욕물 받아 놓을게.”
그래.”

 

자신의 욕망에 이기지 못한 호노카는 에리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정말 아침에 봤던 여우귀와 꼬리가 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영악한 여우와도 같은 미소를 지은 에리는 저녁 준비를 도와준다고 하며 호노카와 같이 정리를 했다. 주방에 같이 선 호노카와 에리는 오늘 저녁은 어떤 걸로 하는 게 좋을까 사다 놓은 재료들과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을 보며 잠시 고민을 하고 난 뒤 결정을 하고 요리를 한 뒤 얼굴을 마주보며 식사를 했다. 같이 목욕을 하기로 했기에 정리도 같이 했다. 항상 같이 하는 일들이지만 오늘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정리를 마치고 받아놓은 목욕탕 안에 들어갔다. 역시나 성인 두 명은 좁구나, 그렇지만 호노카도 에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뒤 호노카와 에리를 서로를 보며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으앗, 지각이야.”


엉망이되 머리로 핸드폰을 본 호노카는 침대에서 황급히 일어나, 바닥에 널 부러진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에리는 잠꼬대로 호노카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노카는 후회를 하지 않으며,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치고 집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아, 하아 간신히 안 늦었다.”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며 강의실 끝 좌석에 앉은 호노카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혔다. 같은 강의를 듣는 친구들이 쉬는 시간 호노카에게 다가와 오늘은 왜 늦은거야? 라고 말을 할 때 호노카는 그냥 늦잠을 자서, 라는 변명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우여곡절 끝에 강의가 끝나고 친구들이 호노카에게 다가와 말했다.

호노카 내일 놀러 가지 않을래?”

내일?”

, 다 같이 놀러 가기로 했는데.”

미안,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불러줘.”
친구들은 아쉽다고 말하며 다음 강의를 들으러 갔다. 호노카도 다음 강의를 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소풍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항상 졸 던 강의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강의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지만, 오늘 따라 시간이 늦게 가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시계를 보고 강의 중에도 틈틈이 시계를 봤지만 정말 오래 된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1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시계를 반복해서 보다보니 어느새 강의가 끝나버렸고 필기 노트는 새것과 다름이 없었다.

 

호노카 왜 이리 표정이 안 좋아?”

에리쨩 이번 호노카 학점이 위험할지도...”


집으로 돌아온 호노카는 소파에 엎드려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소풍이 너무 기대 돼서 오늘 하루 강의들의 필기를 못했다고 말하자 에리는 웃었다. 그것도 소리 나게 웃었다. 발끈한 호노카는 에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왜 웃는 거야, 에리쨩. 에리쨩은 내일 소풍 기대 안 되는 거야?”

아니. 기대가 안되는 건 아닌데, 호노카가 크읏, 너무 귀여워서.”

우우우, 에리쨩.”

알았어. 안 웃을게...크흡, 미안. 그럼 내일 도시락은 어떤 걸로 할까.”

샌드위치로 할까?”
그거 좋네. 집에 어제 사온 빵도 있고 재료도 다양하게 있으니 여러개 만들어 보자.”
그러면 일단 준비 해놓을까. 에리쨩 몇 시쯤에 갈 거야?”
“10시에 갈까?”
, 좋아. 근데 어디로 갈까?”

지난번에 거기 어때, 코토리랑 우미랑 다 같이 갔던 공원.”

, 거기 좋겠다. 와아, 호노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어. 에리쨩 여기 호노카 가슴위에 손 올려봐 엄청 쿵쾅거려.”

그래?”

잠깐 에리쨩 손 모양 이상해. 오늘은 안 돼, 내일 전력을 다해서 놀 거니깐.”
, 알았어.”

 

에리는 즉시 손을 거두고 주방으로 가 샌드위치 재료들을 손질하기로 했다. 호노카도 옆에서 같이 준비를 했다. 소매를 걷어붙일 정도로 의욕이 넘치는 둘은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갔다. 샌드위치, 닭 가슴살 샌드위치, 돈가스 샌드위치, 달걀 샌드위치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가 접시에 가득했다.

 

너무 의욕을 내버렸네.”
그러게...나머지는 좀 나눠줘야겠다.”

 

눈앞에 펼쳐진 샌드위치의 산중 몇 개만을 골라 도시락 통 안에 넣고, 그 외에 준비물들도 미리 준비해둔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넣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일기예보에서도 내일은 화창한 맑은 날이며 가족이나 연인들과 같이 외출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두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에리쨩에게 뭘 하면 좋을지 물어 봤다.

 

양이라도 세면되지 않을까?”

에리쨩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될 것 같아?”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그러면, 양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아리이, 여서엇. 쿠울.”

정말 어린 애라니깐.”

호노카에게 제대로 이불을 덮어준 후 에리도 옆에서 양을 세보며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어두운 방안을 비추고 굳게 감고 있던 호노카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강렬한 햇살에 이기지 못한 호노카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옆에 둔 핸드폰을 집었다. 화면을 키자, 강한 핸드폰 불빛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시간을 확인했다.

830분 아직 충분한 시간이다. 잠깐 눈을 감았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핸드폰을 켰다.

 

음냐, 920....에에엣?”

 

침대에서 황급히 몸을 일으킨 호노카는 옆에서 자고 있는 에리를 흔들어 깨웠다. 에리도 괴러운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 호노카에게 말했다.

 

왜그래 호노카.”

에리쨩, 우리 소풍!!!”

 

말하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너무 당황해 호노카의 입에서는 단편적인 단어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에리는 모든 것을 알아듣고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노카 먼저 씻어 내가 나머지 준비 해놓을 테니깐.”
, 알았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호노카와 에리는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내려왔는데, 갑자기 주차장으로 간 에리가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왜 주차장으로 오라는 걸까? 의문이 가득했지만 호노카는 주차장으로 걸어가 에리에게 갔다. 에리는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앞에 있는 작은 하늘색 자동차 문에 열쇠를 꽂았다.

철컥, 경쾌하게 들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호노카가 말했다.

 

에리쨩 언제 차 산거야?”

산건 아니고 빌렸어.”

와아, 좋다. 근데 에리쨩 차가 있으면 아침부터 그렇게 허둥댈 필요 없었잖아.”

그게...나도 깜빡하고 있었어. 너무 당황해서. 일단 짐부터 트렁크에 놓자.”

헤헤, 에리쨩도 덜렁이라니깐.”

아마 호노카 한테 옮은 게 분명해.”

우웃, 호노카는 그런 거 안 옮기는걸.”


투닥 거리며 트렁크에 짐을 싣고, 소풍 길에 올랐다. 소풍을 가는 장소는 꽤나 예전에 가본 공원 이였다. 뮤즈의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공터 같은 공이였다. 사람도 없고, 주변에 핀 야생화, 푸른 잔디밭에 모두들 만장일치로 그 공원에서 쉬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자그마한 파티를 마치고 난 뒤에도 각자 몇 번씩 놀러간 적이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가지 못했지만, 그곳으로 소풍을 간다하니 절로 노래가 나왔다. 다 같이 불렀던 노래를 오랜만에 부르자, 에리도 운전을 하며 같이 노래를 불렀다.

 

언제 들어도 에리쨩 목소리는 참 예뻐.”
호노카도 정말 예쁜 목소리야.”

얼마나 달렸을 까, 호노카가 다시금 잠에 빠지려 할 때, 차가 멈추고 에리가 호노카의 어깨를 잡아주며 말했다.

도착했어. 호노카.”

정말이야 에리쨩?”

 

에리와 같이 자동차에 내려 기지개를 켜며 굳은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 후 앞을 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름다웠던 야생화도, 푸른 잔디밭도, 눈앞에 보이는 건 넓고 황량한 공터뿐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혹시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었지만 주변의 경관은 비슷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호노카의 눈에 들어온 하얀색 표지판이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개발구역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에리쨩, 여기 개발구역이래.”
“...그러게.”


호노카도 에리도 둘 다 씁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소풍으로 즐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비는 오지 않는다고 일기예보에서도 말했고,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어 보였다.

 

여우비인가, 일단 차 안으로 들어가자 호노카.”

.”


차 안으로 들어간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비는 금방 그치겠지만, 소풍을 갈 장소가 사라져 버렸다. 무거운 침묵만이 맴도는 차 안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에 먼저 말을 꺼낸 건 호노카였다.

 

에리쨩 이 이야기 알아?”

어떤 건데?”
어느 한 마을에 정말 아름다운 여우가 살고 있었데, 금빛으로 빛나는 털과 호수와도 같이 푸른 눈동자는 모든 동물들이 여우를 좋아하게 만들었다고 해, 근데 그런 여우를 사랑한건 동물 들 만이 아니었어.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흘러가던 구름이 그 여우에게 반해서 여우가 살 던 곳에 계속 머물렀다고 해, 그렇게 여우님을 지켜보던 구름은 어느 날 여우님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슬퍼서 엉엉 울어버렸데, 여우님이 결혼을 하는 맑은 날까지 말이야. 그래서 여우비는 구름이 여우가 결혼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슬퍼서 내리는 거래.”

맞아, 그런 살짝 슬픈 이야기였지.”
그래서 지금 이런 비가 내리는 걸 거야. 에리쨩 아니 호노카의 여우님.”
?”

분명 구름이 호노카와 에리를 잔뜩 질투하는 걸 거야, 에리쨩이랑 같이 갈 때도 여우비가 왔었잖아.”
그랬었지.”
에리쨩 호노카는 말이야,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에리쨩이랑 같이 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해. 그러니깐 에리쨩도 웃어줘. 소풍은 살짝 틀어져 버렸지만 말이야. 그리고 저 장소가 없었졌다고 해서 우리들의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호노카.”


호노카를 위로해주려던 에리는 오히려 호노카에게 위로를 받았다. 차안에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무릎위에 올려놓은 호노카의 손 위에 에리가 손을 얹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에리가 서서히 다가오고 호노카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점점 좁혀져 가는 거리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때 쯤,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꼬르르르륵.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호노카의 배에서 계속해서 밥을 달라고 항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호노카는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며 에리에게 말했다.

 

에리쨩. 그게 말이야.”
일단 밥 먹자.”

“....”


뒷자석에 놓은 도시락 바구니를 가져와 샌드위치를 하나씩 꺼냈다. 호노카는 돈가스 샌드위치 에리는 달걀 샌드위치를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찬 샌드위치를 먹으며 차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식사를 즐겼다.

 

샌드위치 정말 맛있어 에리쨩. 달걀 샌드위치는 어때?”

자 한입 먹어봐.”
아앙.”

 

에리의 달걀 샌드위치를 먹은 호노카는 계속해서 맛있다를 연발하며 에리에게도 돈가스 샌드위치를 권했다. 서로의 샌드위치를 한 입씩 먹은 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고 호노카는 배가 부른 듯 의자에 기대었고 에리는 바구니에서 커피를 꺼내 호노카에게 건네 줬다.

 

여기 후식.”

고마워 에리쨩.”
, 호노카 저기 봐봐.”

 

어느새 그친 비, 에리가 가르친 손가락 끝에는 언덕과 구름 사이를 연결하듯 긴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차 밖으로 나온 호노카와 에리는 아름답게 빛나는 무지개를 보며 말했다.

 

저기 에리쨩.”

, 호노카?”
구름은 정말로 좋아하는 여우님에게 이런 선물을 주려 한 게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후후, 예쁘네.”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자연의 작품을 감상하던 호노카와 에리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러면 어디로 가볼까?”
에리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
좋아, 그러면 일단 출발해 볼까.”
“좋아, 어서 출발하자 에리쨩.”


에리가 엑셀을 밝고, 자동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소는 정해진 곳이 없지만 서로가 함께라면 어디든지 재미있을 것이라고 이런 일상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바라며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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